포토스토리
정말 오랜만에 우연히 산선배를 만났습니다.
겨울이면 산악인들이 자주 찾는 양주 도락산 산학폭(일명 가래비) 에서 말입니다. 근 10년 가까이 못보다가 만나니 무척 반갑더군요.
//이미지//
그 선배는 도봉산입구에서 등산장비점을 운영했었고 지금은 중고장비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 선배는 예전에 등반을 열심히 했었던, 아니 '열심히'라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열렬하게 다닌 선배였습니다.
저는 학창시절에는 등반을 전혀 안하다가 회사를 다니면서 등반을 한 경우지만, 그 선배는 고등학교 입학하면서 산악회에 입회하여 등반을 했으니 엄청 오랜 기간 산을 다닌 것이죠.
지금은 없어진 고등학교인 서울의 수송전공이라는 고등학교를 나왔는데, 그 학교 출신들이 만든 산악회가 ‘경송산악회’ 이고 그 산악회에서 개척한 바위길이 선인봉에 있습니다. 지금도 인기 있는 암벽루트인 '경송A', '경송B' 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미지//
그 선배는 도봉산입구에서 등산장비점을 운영했었고 지금은 중고장비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 선배는 예전에 등반을 열심히 했었던, 아니 '열심히'라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열렬하게 다닌 선배였습니다.
저는 학창시절에는 등반을 전혀 안하다가 회사를 다니면서 등반을 한 경우지만, 그 선배는 고등학교 입학하면서 산악회에 입회하여 등반을 했으니 엄청 오랜 기간 산을 다닌 것이죠.
지금은 없어진 고등학교인 서울의 수송전공이라는 고등학교를 나왔는데, 그 학교 출신들이 만든 산악회가 ‘경송산악회’ 이고 그 산악회에서 개척한 바위길이 선인봉에 있습니다. 지금도 인기 있는 암벽루트인 '경송A', '경송B' 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 루트를 개척한 장본인이 바로 '공재은'이라는 이름의 클라이머였고, 그 선배는 80년대 인수파, 선인파 하던 시절 선인파를 대표할 만한 뛰어난 클라이머 중의 한 명이었습니다. 당시 선인파에는 국내에 내노라하는 걸출한 클라이머들이 다수 있었는데 그 선배는 그 클라이머들 중 한 명이었죠.
//이미지//
예전의 70-80년대 클라이머들은 대부분 나이 40이 됙 전 결혼하고 가정을 이루고 생업에 종사하느라 산을 떠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등반을 한다 해도 예전처럼 못하기 때문에 가끔 후배들과 줄을 묶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죠.
위에 그 선배는 맹렬한 클라이머였으므로 체력도 좋고 등반도 잘했지만, 군대는 현역이 아닌 방위(단기사병)를 다녀왔습니다. 군에 못간 이유가 색맹인가 그랬을 겁니다.
암튼 그 선배는 방위시절 선인봉 야영장 텐트에서 군부대를 오가는, 즉 출퇴근을 산에서 했었습니다. 그 정도로 골수 바위꾼 정말 좀처럼 보기 힘든 산악인임에 틀림없었습니다.
도봉산자락 마을에 내려와서 쌀과 부식을 잔뜩 짊어지고 석굴야영장으로 올라가면 몇 달씩 속세에 내려오지 않고 텐트에서 생활하며 등반만 하며 지냈다고 합니다.
저도 등반에 입문하고 초창기에 그 선배를 따라다니며 등반을 배우곤 했습니다. 선인봉 인수봉에 가면 죄다 아는 선후배들이더군요. 그러던 선배는 결혼을 하고 생업을 위해 장비점을 차렸습니다.
처음에는 서강대학교 근처에 있다가, 신용산역 근처로 옮겼는데 계속 장사가 안되다 보니 손해를 많이 봤고 나중에는 도봉산 입구로 오게 되었습니다.
도봉산 입구에는 천만불이라는 식당이 있는데, 아주 오래되었고 선인 골수 산악인들에게는 고향같은 집이죠. 그 집 어머니와도 각별한 사이였는데, 어머니말에 의하면 중학생때부터 ‘엄마’라고 부르며 따랐다고 하더군요. 그러던 까까머리 학생녀석이 나이 먹고 장비점 차려서 바로 옆집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으니 격세지감이라 할 만 하지요.
그 공재은 선배가 결혼할 때 주례를 봐주신 분이 도봉산장을 운영하시던 유용서씨(설악산 권금성산장 주인 털보 유창서씨의 형)입니다. 지금은 미망인인 할머니 혼자 남아 커피를 볶아서 가게를 운영하고 계시죠.
도봉산 입구에서 장비점을 하던 선배에게 나는 자주 들렀습니다. 선인봉 야영들어갈 때 마다 들렀고, 기회가 있으면 함께 술을 마셨습니다. 장비점 운영이 어려워 자금 결제가 어렵다고 돈을 부치라고 하면 돈을 보냈다가 받지 못해 장비로 가져온 적도 몇 번 있었죠.
내가 산악회 회장을 맡고 있던 시절에는 장비구입은 선배의 장비점에서 주로 했었습니다. 그 선배는 산을 떠났어도 가끔 후배들과 줄을 묶곤 했는데, 선인봉의 중상급 바위길인 '표범길' 을 암벽화도 아닌 릿지화도 아닌 일반 운동화를 신고도 여유있게 등반을 해치웠습니다.
진정 선인파 골수 클라이머가 아닐 수 없었지요.
그 선배와의 추억은 비단 이것 뿐이 아니라 재미난 에피소드도 아주 많았습니다
그 선배는 지금 거벽등반교육을 가르치는 등산학교인 '익스트림라이더'(고 최승철 김형진이 1997년에 만듦) 등산학교 1기 수료생이기도 합니다.
공선배는 죽은 승철과 형진을 무척 아꼈고 자랑스러워 했습니다.
선인봉을 대표하는 젊은 시절의 공재은선배에게 비치던 두 후배의 모습은 꼬맹이들이었는데, 세월이 흘러 한국을 대표할만한 거벽등반가로 거듭 났을 뿐아니라 암벽 빙벽에서도 국내 최고 반열에 올랐기 때문이었죠.
그 후배들이 해외원정을 간다고 들르면 장사가 안돼 힘든 시기여서 현금은 못주어도 등반에 필요한 장비들을 챙겨주곤 했드랬습니다.
암튼 가래비 빙벽장에서 오랫만에 만난 공재은선배는 머리에 눈이 하얗게 내려 앉아있었고 몸이 많이 불어있었습니다. 날씬했고 부드러웠던 선배의 몸은 물리적 나이 60살을 훌쩍 넘어 외견상으로는 5년 이상 더 들어 보였죠. 살이 찌고 배도 나와서 더 나이가 들어보였을 겁니다.
내가 선배를 발견하고 “재은 형” 하며 외치자, 나를 보자마자 처음 선배가 한 말이 그것입니다.
“이야~ 상섭아, 반갑다...이게 몇 년 만이지?
......
아무튼 너 지금도 산에 열심히 다니냐!”
난 가끔 선배들이 이런 말을 할 때 두 가지로 해석을 합니다.
- 넌 참 오랜 기간 동안 열심히 산에 다니는 구나.
- 넌 이 나이 먹고도 여태 산에 다니냐
전자는 칭찬이고 후자는 비아냥입니다.
전자는 '초심을 잃지 않고 등반을 계속하니 대단하다'는 것이고, 후자는 '젊은 시절 청춘을 바쳐 등반에 몰두한 건 좋은데, 나이 먹어서도 계속 하고 있느냐 '라는 자조적인 말입니다.
선배는 도봉역 입구에서 중고등산장비점을 운영한다고 말하며 조만간 소주 한 잔 기울이자고 하더군요. 그 형 술을 엄청 좋아 합니다. 대부분 산꾼들이 그렇듯이…
//이미지//
그런데 그 선배의 말처럼 난 왜 여태 산을 다니고 있는 것일까요?
등반을 끝내고 집으로 오는 내내 그리고 한 동안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던 화두였습니다.